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야간 노동이 무슨 혁신이냐고 따지지는 않겠다. 혁신인지 아닌지는 시장이 판단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법이 아니라고 해서 식사시간 1시간 외에는 휴게시간이 없는 것, 최영애 씨가 사망한 뒤에야 휴게실에 난로를 들인 것, 김동식 소방관의 희생 끝에 겨우 일부 에어컨을 설치하기 시작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야간 노동 중 화장실에서 쓰러진 뒤 숨진 고영준 씨와 같은 인천 4물류센터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쿠팡을 떠난 최준혁 씨는 "코로나 시대에 쿠팡 같은 회사가 없는 일자리를 만들어줘서 고마운 면도 있지만, 생명의 가치, 인간성의 가치도 어느정도 생각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어떨지 상상해보는 능력. 눈부신 성취를 이룬 이 혁신 기업에 딱 하나 없는 것은 바로 그런 상상력이 아닐까.

🔖  (조성주) "고어 비달이라는 미국의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성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남들이 패배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게 성공이라면, 공정을 들고나오는 것은 단순히 소득 감소를 우려해서만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엘리트가 되고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고생했고 고난을 거쳤지만, 그 경쟁을 통과하는 과정 자체가 자신이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 증명해주는 서사로 작동한다. 그 과정을 못 이겨낸 사람들은 패배자로 있어야 자신이 정당해진다. 내가 소득을 많이 올려 성공하는 것보다 남들이 패배자의 위치에 있는 게 더 중요하다."

🔖  (...) 극 중 화자는 영국 사회가 망가져가는 과정을 지켜본 아흔이 넘은 여성으로, 그는 '우리가 계산대 여자들을 기계가 대체하도록 내버려두었다'며 자조한다. 거리에 나가서 시위하지도, 항의 편지를 쓰지도, 다른 가게로 가지도 않았다고 말이다. 운 좋은 소수에 속하지 못한 사람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심지어 목숨 부지를 걱정해야 하는 세상은 누가 만들었나. 운이 아니라 재능 있는 소수라고 해도 이런 낙차는 정의롭지 않다. 아니, 지속가능하지 않다. 늙은 나도, 젊은 나의 자식도 언젠가 그곳으로 떨어질 것이므로. 존재하는 성벽을 그대로 두고서 추진된 정규직화는, 성벽 밖에 남은 이들의 저항 또는 냉소를 피하기 어렵다. 이번에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이들이 인천공항을 위해 그 일을 계속 해왔고 또한 잘할 수 있는 '자격 있는' 이들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유감스럽게도 돌파하기 어렵다. 그게 우리가 만든 세상이다. 그걸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  네이버에서 댓글을 하나 봤다. '출발선이 다르므로 공정한 경쟁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취지의 기사에 달린 댓글이었는데, '결과의 평등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출발선이 다른 건 사실일지 모르지만, 어찌 되었던 경쟁의 결과를 인위적으로 비슷하게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거부하겠다는 '결의'가 읽혔다. 나는 진보가 싸워야 하는 전장이 있다면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경쟁의 결과가 똑같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 격차가 너무 크면 모두가 경쟁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경쟁 자체가 사람들을 구속하는 힘이 커진다. 이러면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기 어렵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격차를 그대로 둔 채 일부만을 성벽 안으로 집어넣는 방식이다. '결과의 평등'까지는 아니더라도 결과가 구속하는 힘을 줄일 필요가 있다. 법철학자 조지프 피시킨은 <병목사회>에서, 경쟁 방식의 공정성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애초에 왜 자원이 희소하고 경쟁이 치열한지 기회구조 자체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회의 평등'을 넘어 '기회구조의 다원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 입시나 대기업 공채 같은 좁은 '병목' 주변에 다른 경로를만들어서, "개인들이 병목을 통과하지 않고도 높이 평가되는 재화와 역할에 도달하게 하라"라고 피시킨은 쓴다. 여기서 '높이 평가되는 재화와 역할'을 나는 노동조합이 사측과 협상해서 만들어낼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본다. 그 방법은 '어떤 숙련이 요구되는 일을 하느냐'에 따라 임금을 주는 것, 곧 직무급이다. (...) 생애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나름의 발전 가능성이 있고 살 만해야 한다. 임금체계를 우회하고 그걸 찾을 방법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하향평준화를 두려워하면서 최상위 소수의 독식을 그대로 두는 것이 진보인가? 현상 변경으로 잃을 것이 많다면, 이것이 진보인가? 자원 배분의 방식을 논하지 않고 불평등을 이야기할 수 없다.